역사 속으로 사라진 로고들 (1) ..

김신의 디자인 히스토리 vol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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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영화 는 누구보다 헬베티카 활자를 사랑했던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마시모 비넬리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그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로고를 자랑스러워한다. 그것은 1966년에 작업을 시작해 1968년에 적용되었고, 이 영화가 개봉된 2007년까지 무려 40년 넘게 아무런 변화 없이 지켜져왔기 때문이다. 그 전의 로고와 비교해보면 비넬리가 디자인한 새로운 로고는 확실하게 세련되었다. 구체적인 형상에 가까웠던 독수리는 간결하게 추상화되었다. 불필요한 타원형은 사라졌다. 어설프게 기울어진 AMERICAN이라는 글자는 바로 세웠다. 로고는 전반적으로 견고해지고 믿음직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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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비넬리는 “디자이너의 일이란 무질서와 조악한 것들과의 투쟁”이라고 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진화는 확실히 그의 말을 증명한다. 혼란스러움이 사라지고 분명해지고 질서가 잡혔다. 활자와 이미지들 사이의 공간을 보면 그의 말이 더욱 자명해진다. 옛 로고에서 이미지와 글자들 사이의 공간을 보라. 그 다음 비넬리가 디자인한 새 로고의 이미지와 글자들 사이의 공간을 보라. 정말 완벽해서 더이상 더하거나 뺄 것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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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세계 기업들의 로고 변천사는 이처럼 무질서한 것, 지나치게 많은 요소들, 구체적인 것, 장식적인 것을 제거하는 과정의 역사다. 그리하여 질서, 간결성, 추상성, 무장식성을 획득한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모던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를 볼 때 사람들은 흔히 “세련됐다”는 한 마디로 말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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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초의 CI(Corporate Identity)라는 평가를 받는 디자인 작업이 있다. 독일의 디자이너 페터 베렌스가 AEG(Allgemeine Elektricitäts-Gesellschaft)를 위해 작업한 일련의 디자인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CI라는 개념은 2차 세계대전 뒤에 생겼다. 페터 베렌스는 그 개념은 몰랐지만 기업이라면 모름지기 일관된 정체성을 갖고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고 일찍이 깨달았던 것이다. AEG(아에게)는 게다가 오늘날로 치면 삼성처럼 여러 사업체를 거느린 거대 기업이므로 더욱 그러한 통일된 이미지 전략이 더욱 필요했다. 그리하여 베렌스는 역사상 최초로 기업의 전용 서체를 디자인했고, 그런 서체를 바탕으로 로고와 기업의 각종 홍보물, 카탈로그를 일관되게 디자인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그는 제품과 공장까지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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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EG의 로고 진화는 확실히 장식적인 고전 스타일에서 모더니즘으로 변화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1896년의 로고는 당시 유행했던 아르누보 스타일이다. 이 로고가 지나치게 장식적이라고 여겼던지 1900년에 새로운 로고를 발표한다. 이 로고를 디자인한 사람은 오토 에커만이라는 독일 아르누보의 대가다. 1906년에 페터 베렌스는 AEG로부터 홍보 팸플릿 디자인 의뢰를 받는다. 그는 대량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서체를 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독일은 20세기 전반기까지 중세의 고딕체를 유럽 어느 나라보다 많이 쓰는 국가다. 베렌스는 고딕체의 장식성을 제거한 가독성 높은 로만체를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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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체를 기반으로 1908년에 모던화한 AEG 로고가 탄생했다. 이 로고는 여러 기업들을 거느린 AEG의 정체성을 상징하고자 벌집 모양을 디자인했다. 이 또한 다소 복잡하므로 1912년에 이니셜 글자만 남긴 로고를 디자인했고, 이 간결하고 명료한 로고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현재 AEG의 로고는 1912년의 로고에서 세리프를 제거해 더욱 단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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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대표적인 모던화 사례로 미국의 전설적인 그래픽 디자이너 폴 랜드가 디자인한 IBM 로고가 있다. 2차 세계대전까지 IBM은 기업 이름으로 ‘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라는 풀 네임을 썼다. 따라서 로고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입체적인 구 형태여서 무질서해보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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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 IBM이라는 이니셜로 축약되고 두꺼운 로만체로 디자인되었다. 폴 랜드는 1956년에 이 로고를 리뉴얼했다. 로만체가 가진 획의 굵기 차이 때문에 로고는 안정감이 떨어진다. 특히 커다란 M자에서 더욱 그렇다. 랜드는 이것을 슬랩세리프(획의 굵기가 일정한 서체)인 시티 미디엄(City Medium)체로 교체했다. 1967년에는 이것을 줄무늬 스타일로 다시 개선했다. 줄무늬로 디자인되자 로고는 IT 기업의 속도와 진보성을 상징하는 듯해 기업의 정체성과 더욱 부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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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기업 로고의 개선이 언제나 환영 받았던 건 아니다. IBM 로고가 줄무늬로 바뀌었을 때 직원들이 죄수복을 연상시킨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그런 연상의 이유가 아니라 연상이 안 된다는 이유로 개선된 로고가 퇴짜를 맞은 일도 있었다. 프루덴셜 보험회사는 19세기부터 지브롤터 바위를 기업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대한 바위처럼 튼튼한 기업이니 안심하고 돈을 맡기라는 의미다. 이 기업의 로고도 모던화의 경향에 따라 구체적인 바위가 점점 간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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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1984년에는 마치 아디다스의 삼색 선처럼 대단히 추상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 문제는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아무도 지브롤터 바위를 연상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결국 추상적이고 세련되고 모던한 로고를 개선해(?) 다시 좀더 구체적이고 복잡한 예전의 로고로 되돌아갔다. 모던에서 클래식으로 변화한 이 로고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세련된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모더니즘적인 로고가 늘 우수한 것인가? 그것은 필연적인 진보의 과정일까? 촌스러운 것은 개선되어야만 할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글ㅣ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서 미술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에서 17년 동안 기자와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낸 뒤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와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 , 이 있다.